대구 팔공산 방향으로 공산터널 지나면 미대동 사거리 신호등이 나온다. 신호등 지나면 우측으로 간단한 운동체육시설이 나오고 바로 이어 여러 기념비들이 늘어서있다. 늘 차타고 지나가면서 보던 비석인데 그 크기나 조형물들이 여사스럽지 않아 저길 한번 들러봐야지 생각했는데...늘 아쉬움이 이곳엔 주차장이 없다. 그러니 들러보고 싶어도 차를 못 세워 그냥 지나가기를 여러차례. 오늘은 각오하고 우회전해 체육시설 쪽으로 들어가 인도 위 잔디밭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세워져 있는 기념비들을 살펴보았는데...그 상징성은 예상을 뛰어넘는것이었다.
1 공산동 선현현양비
2 이영선생 청백사 석각비
3 6. 25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4 미대동 3.1운동기념비
선현현양비 - 옛 선현들의 삶을 통해 내일을 열어가는 지혜와 정신을 본받자는 차원에서 충절, 효행, 청렴의 상징으로 대구 공산동 지역 인물 3분을 기리는 현양비이다.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선생 (1705-1786) - 나라를 경영할 큰 효자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 선생 (1494-1563) - 청렴, 청백리 괘편당 이영선생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 선생 (1574~1644) - 위국충절
청백리 이영(李榮, 1494~1563)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당(掛鞭堂)이다.
1514년(중종 9) 21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5년(인종 1) 정평 부사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나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가선대부에 올라 회령 부사가 되었는데 치성(治聲)이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 33인을 선발하였는데 퇴계 이황과 함께 이영도 포함되었다.
1553년(명종 8)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듬해인 1554년(명종 9)에 북병사(北兵使)로 여진족을 잘 다스렸다. 1555년(명종 10)에 병조참판으로 내직으로 들어올 때 명종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다만 헤진 이불 한 채만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청백(淸白)은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도다”라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제주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돌아올 때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 하나도 관(官)의 물건이라 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이로써 괘편당(掛鞭堂)이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저술로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가 있으며 1729년(영조 5) 백안동에 청백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복구되지 못했다. 2010년 김태락 등 지역민들이 미대동 앞동산에 현양비(顯揚碑)를 세웠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청백사淸白祠
괘편유촉掛鞭遺躅 매정공수梅亭恭修 조두전철祖豆奠撤 지재원허只在院墟
고유표석古有表石 태몰갱수苔沒更竪
괘편당유적인 매화정 옛터에 공경히 제향을 드렸는데 제향은 끊어지고 다만 서원의 터만 남았네. 옛날에 표석이 있었는데 이끼에 매몰되어 다시 세운다.
6. 25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3.1운동 기념비 - 채경식
1896년 1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113번지)에서 아버지 채승원(蔡昇源, 1867 ~ 1906. 10. 21)과 어머니 진주 강씨(1864 ~ ?)[5]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해북촌면 미대동 221번지로 이주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 · 채갑원 · 채명원 · 채봉식 · 채송대 · 채학기 · 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11월 6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이 모든 비들이 대구시나 구청에서 주관한 것이 아니라 대구 동구, 특히 공산동의 뜻있는 분들이 앞장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의미를 더하는 것 같다.
올해도 여지없이 미대동 은행나무길 도로 보수공사를 하는것 같다. 얼핏봐서 도로를 중앙으로 2센티정도 늘리는것 같은데... 그렇게 연말만 되면 엉뚱하게 예산 펑펑 쏟아붓지 말고 이런곳에 주차장이라도 조성하는 것이 좋지않을까. 주차장이 잘 조성되어 많은 분들이 볼수 있는 대구의 명소로 자리잡길 기대한다.
'석각 石刻'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도 남산계곡 바위글씨 탁본전 2017 10 9 (0) | 2023.02.05 |
---|---|
중국 사조사四祖寺 영윤교 석각 (0) | 2023.02.04 |
용두암과 용연 석각 (제주 2박3일 1일차 2022 10 28) (0) | 2022.10.31 |
기획정원 심원정心遠亭 25장소 2022 6 25 (0) | 2022.06.25 |
설악산 계조굴繼祖窟 석각을 찾아! (0) | 2021.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