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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 石刻

합천 연호사烟湖寺 함벽루涵碧樓 석각 ①

by 검은마루 2017. 11. 7.

보장천추寶藏千秋
돌도사와 떠나는 석각石刻기행     합천 연호사烟湖寺 함벽루涵碧樓 석각 ①


                                             연호사烟湖寺 석각

 

 
연호사 전경       연호사烟湖寺 석각

 


연호사烟湖寺
합천 연호사烟湖寺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여왕12(643)년에 와우 선사가 창건 했다.
백제 윤충장군이 2만의 대군을 이끌고 대야성을 함락 시켰는데, 그때 신라장병 2천여 명이 전사하고 1천여 명이 포로로 잡힌 대야성의 전투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합천의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이었는데 그는 민생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민심을 이반 시키고 뒤숭숭하게 해서 결국은 백제의 공격을 받고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체 항복해서 죽임을 당했다. 당시 검일이라는 평민은 아내를 김품석에게 빼앗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 김품석에게 당한 한을 되갚았다.
김품석이 항복을 결심하자 참모인 죽죽은 끝까지 항전 할 것을 다짐하며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신라 장병 2천여명과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 죽죽장군등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라의 원찰로 창건 되었다.

 

 


함벽루涵碧樓
함벽루涵碧樓는 연호사에 딸린 누각으로 고려 충숙왕8(1321)년에 합주지주사陜州知州事  김영돈(金永暾1285~1348)이 건립하였다. 함벽루 건립 기문을 지은 고려 예문관 대제학 안진安震 선생이 1348년에 지은 김영돈의 묘지명에 의하면 김영돈은 ‘김순金恂과 어머니 양천 허許씨 사이에 1285년 태어났다. 당초 함벽루 기문에 건립자가 합주태수인데, 그는 누대공신 상락공의 착한아들 김군金君’이라고만 전 했다. 창건 이래 680여 년 동안 함벽루의 건립자 실명을 모르다가 2004년 4월 안동김씨 대종회에서 김영돈이 건립자라는 방증 자료를 준비하여 문화재청에 수정을 요구 하므로 써 건립자 실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대야성大耶城(합천읍 황우산) 기슭에 위치하여 황강 정양호正陽湖를 바라볼 수 있게 지어져 오래 전부터 시인 ‧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되었다. 퇴계 이황(1501∼1570) · 남명 조식(1501∼1572) · 우암 송시열(1607∼1689) 등의 시와 기문이 누각 안에 걸려 있다.

 

함벽루 기문記文 기록으로 보는 함벽루
고려의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은 함벽루에 최초 기문記文(함벽루기涵碧樓記1321-1348사이)을 남겼다.
『내가 15세 되던 해부터 초가집에서 글을 읽으며 사방을 모른 지가 10년이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의 과거에 응시하려고 평양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영명사永明寺 부벽루浮碧樓를 보았고, 5년 뒤에 진양晉陽의 원으로 나가서 또 용두사龍頭寺 장원루狀元樓에 올라 평생에 본 남북의 절경이 이 두 누대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어제 왕사王事로 인하여 강양江陽으로 가는데 도중에 한 누대를 바라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하고 단청이 눈부셔 봉황이 반공에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누대는 어느 때에 지은 것이며 터를 잡은 이는 누구인가”하니, 객이 대답하기를, “지금의 태수가 새로 창건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하여 배를 띄워 강을 건너 난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면모와 형세가 지난번에 본 두 누대보다 못하지 않고 단장의 기이함은 그보다 나았다. 아, 이 고을이 있는 때로부터 곧 이 산이 있었고, 옛날의 영웅 호걸들이 와서 이 고을을 다스린 자도 많았으나, 한 사람도 푸른 산을 파고 맑은 물 가까이에 누대를 세운 자가 없었는데, 오직 태수가 비로소 얻었으니, 이 어찌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었다가 그 사람에게만 준 것이 아니겠는가.
………
객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노래를 써서 이 누대의 기記로 삼는 것이 좋겠다”하기에, 내가 곧 붓을 가져다 썼다. 그 경영經營의 보태고 뺀 것과 관람의 크고 적은 것은 시詩에 능한 자가 밝힘을 기다려도 늦지 않다. 누대를 함벽涵碧이라고 일컬은 자는 누구이냐. 태수가 스스로 이름 지은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 동안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군이다.』라고 하였다.

1680년 함벽루를 중창한 조지항趙持恒군수가 지은 중창기重刱記에는 함벽루 주변의 아름다운 곳에 대한 명칭이 기록되 있다.
“··· 누각 동쪽 모퉁이에 바위가 높이 서서 달을 제일 먼저 바라보는 고로 망월암望月巖이라 쓰고, 누각 뒤에 첩첩한 돌이 지붕위에 높이 나와서 가히 피리(笛)를 부는 사람을 연상하게 하므로 또, 취적吹笛이라 쓰고···”

 

조지항 군수의 기문에 등장하는 망월암望月巖 석각

 

 

 

함벽루와 관련된 기문은 6편으로 안진安震, 강희맹,姜稀孟, 송시열宋時烈, 조지항趙持恒, 이채李采, 이상학李相學의 기문이 있으며, 시판詩板은 정이오鄭以吾, 이황李滉, 조식曺植, 조준趙俊,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람들의 찬시가 걸려 있다.

 

 

   
송시열의 함벽루기涵碧樓記 

 

 

 

                      

송시열은 합주현감 조지항의 간청을 받고 기문을 남겼다. 이와함께 누각 후면 반듯한 바위에 함벽루 를 새겨넣고 기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새겨넣었다.

                         

송시열의 함벽루기
함벽루기涵碧樓記
함벽루가 본군 남쪽 4리지점에 있다. 내가 젊었을때 여지서를 읽고 이미 이 루가 있음을 알고 그 경치를 상상하고 한번 가서 오르고 다다라서 마음과 눈이 상쾌하지 못함을 한탄하더니 경신년에 은혜를 입어 바다 밖으로부터 돌아올 때 다만 저기 푸른빛이 숨어 비치고 물과 하늘이 맑은데 한 구역 좋은 형승을 이룬 것을 보았다. 그러나 엄숙한 길이 촉박하여 능히 눈을 놀려보지 못했더니 금년 정월에 군수 조후가 나를 찾아 산중에 이르러서 말씀하기를 함벽루 유지가 오래 비어서 예전 자취가 거의 없어지고 여기에 흉년이 겹쳐서 시공할 꾀가 없더니 우연히 다행한 운수를 만났다.
지난 장마에 큰나무 몇 그루가 상류에서 떠내려와서 강언덕에 걸렸으니 들보와 기둥을 할만 하였고, 모래쇠가 강가에 쌓여 못을 만들 만하니 이것이 귀신이 그 일을 도운 것이다. 드디어 일꾼을 모집하여 중수를 시작한지 한달이 못되어 공력을 마치니 그 새 다리가 나루어귀에 가로누운 것은 함벽루에서 보면 눈에 먼져 들어오는 자리라. 고을의 부로들이 서로 더불어 보고 칭찬하여 말씀하되 함벽루 퇴락한지가 몇 해가 되었다가 지금다시 예전을 회복하고 또 귀신의 도움을 얻었으니 이것은 기이한 일이니 가히 기문이 없지 못할 것이리라 했다. 조후가 글을 보내어 말씀하되 부로들의 청원이 이와 같으니 자네가 어찌 한 말씀 하여 부응하지 아니하리오. 내가 말씀하되 폐하고 떨어진것을 일으키고 수축하는 것은 옛날부터의 도리라. 예전에 자산이 진나라의 다리를 수축하지 아니하고 손님이 옴에 사관이 없음을 보고 진나라가 반드시 멸망할 것을 알았으니 또 사관과 우전을 더하여 꾸밈은 이것이 유씨의 집안법이고 주부자가 소학을 편찬하신지라 조후는 예전 포저 문효공의 손자라 그 교훈을 받은바가 있는지라. 백성을 다스리고 일을 처리함이 모두 마땅함을 얻고 남은 힘이 관우에 미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세금을 가로 거두어 스스로 경영하여 자본을 취하고 관청일 보기를 진나라 여읜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비유할 것인가. 내가 희롱하여 조후에게 말하되 변하 상류의 나무는 명도가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떠내려 와서 스스로 물어 귀에 걸렸더니 지금 조후가 복구한 정성이 어찌 능히 나무와 쇠를 감동시킴에 이르렀는고. 지금 봄에 굶주린 백성들이 들에 둘려있어 채색이 많으니 조후가 여기에 그 정성을 반드시 배나 둘 것인 즉 그 능히 장관을 감동시키고 능히 조정을 감동시킴을 내가 알아서 합천의 백성을 위하여 장차 기사를 명함을 축하하노라. 이집의 앞뒤에 물과 산의 기상과 맑고 넓은 좋은 경치같은 것은 예전 사람의 시와 기문에 구비되어 있으니 이에 거듭하지 아니하노라. 조후의 시가 자못 아름다워 풍류의 취미가 있다. 예전에 주부자가 동안을 관리할 때 절벽에 써서 이르되  해가지고 하늘이 차운데 마실 술이 없으니 공연히 기생莫愁을 불러오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하셨고 또 일찍 문효공이 주부자 말과 뜻이 간절하니 조후가 여기에 반드시 능히 경계를 더욱 심한 것이 있을 것이다. 조후의 이름은 항恒이요 자는 여상이니 풍양세가이다.
때는 숭정 임술년 봄날에 은진 송시열(1682)은 기록함. 무인년 3월에 중간함.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강석정의 사랑방 http://blog.daum.net/qhwnd128/16905659

 

팔공산 도림사 월간 도리도리 2017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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