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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領側成峰
  •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입 벌려 웃지않으면 바보!!
  •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 有仙則名 산은 높고낮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을 날린다.
석각 石刻

청암사 1

by 검은마루 2017. 7. 9.

보장천추寶藏千秋 돌도사와 떠나는 석각石刻기행

해인사-홍제암-용암리-단지봉-수도산-수도암-청암사

 

청암사

 

청암사는 해인강원 시절 정대불사라는 큰 행사를 마치고 해마다 소풍가듯이 떠났던 사찰이다. 말이 소풍이지. 해인사에서 홍제암 뒷산을 넘어 거창 가북 용암마을을 지나 단지봉에서 노래한곡 부르고 불령산 수도암에서 점심공양 후 산넘어 가면 청암사이다. 산을 세 개나 넘는 7시간에 걸친 대장정이다. 1996년 치문반(1학년)때 젊은 패기로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하며 앞에 가던 윗반스님들을 지나 선두권에서 산행을 했다. 수도암 산행을 마치고 다음날 우리는 윗반스님들께 불려가 무릎 꿇고 경책을 받아야 했다.

 

1996 해인사에서 청암사로의 산행. 산행도 수행의 일부로 질서 있게 줄지어 안행을 한다.

 

산행도 수행으로 단체 산행시는 질서를 유지하며 순서대로 좌차를 지켜 안행하듯이 산행을 해야 하는데 윗반 스님들을 가로질러 산행을 해 질서와 화합을 깼다는 지적이시다. 우리는 그날 밤 3천배를 해야 했다. 강원 치문반때면 연례행사로 어김없이 시행했던 청암사 산행과 3천배, 훗날 안 사실이지만 산행후에는 별 잘못이 없어도 윗반은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3천배를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위 신고식이라 해야 하나. 우리도 사집(2학년)반 올라가서 아랫반에 똑같이 했다. 사랑스런 자비심으로… 청암사는 나에게 일곱시간 산행과 철야삼천배로 기억되는 사찰이다.

 

 

1996년 청암사 산행시 호계교를 지나 석각이 집중적으로 새겨있는 세진암을 지나고 있다.

청암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불영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58년(헌안왕 2)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고, 혜철惠哲국사가이 머물기도 하였다.  1897년(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대운大雲스님이 완성하고 42수(手)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년 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스님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전六和殿 · 진영각眞影閣 · 정법루正法樓 · 일주문一柱門 · 사천왕문四天王門 · 비각碑閣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 · 보광전普光殿이 있다.
청암사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晦堂정혜스님의 비각碑閣과 대운당大雲堂의 비각이 있다.

 

 

 

청암사가 대중에게 유명해진 것은 인현왕후가 머문 절이기 때문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년 - 1701년)는 조선 숙종의 두 번째 비로 성은 민씨閔氏이다.
장희빈과의 암투에서 밀린 인현왕후는 기사환국(1689)때 머물던 곳이 극락전 별채, 복위 기도를 올렸던 곳이 보광전이다. 인현왕후는 극락전에서 만 3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현왕후가 제자리를 되찾은 건 1694년 갑술옥사 때다. 그는 복위 뒤 청암사에 감사 편지를 보내는데, 당시 편지는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694년 복위되었으나  소생 없이 병으로 요절하였다.
 궁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썼다는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한다.

 

인현왕후가 머물렀던 청암사 극락전

 

호계삼소虎溪三笑가 연상되는 청암사 석각

 청암사의 석각의 특징은 중국의 여산 혜원스님의 호계삼소를 연상케 하는 각자를 떠올리게 한다. 여산폭포廬山瀑布와 호계虎溪가 그것이다.
  호계는 중국 여산廬山에 있는 계곡으로,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손님을 배웅할 때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호계라 이름 지었다. 혜원스님이 손님을 보낼 때는 이 호계를 경계로 하여 그 곳 이상 배웅을 하지 않았다.(영부출산影不出山 적불입속跡不入俗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
  도사인 육수정陸修靜과 선비이자 시인인 도연명陶淵明의 두 사람을 혜원스님이 배웅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도취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쳐 버리고는 모두 크게 웃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삼소도三笑圖는 이에 근거한 것이다.
혜원 화상이 도연명 · 육수정과 함께 나누는 법열法悅 속을 노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의 다리를 건넌 것은 각자의 종교나 지위를 떠난 범성일여凡聖一如의 진리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법당으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에 새긴 여산폭포廬山瀑布                

 

 

호계虎溪

 

조선후기 중국의 호계삼소虎溪三笑이야기를 잘 아는 스님이 설계하고 새겼거나 청암사의 구조가 복판으로 계곡이 흘러 자연스레 호계교와 같은 구도로 지어져서 호계삼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웅전으로 건너가는 다리 입구에 여산폭포廬山瀑布라는 각자가 새겨있으며 계곡 건너(대웅전 기준) 바위에는 호계虎溪라는 글씨가 초서로 새겨있다. 여산폭포와 호계 사이 거대한 암벽에는 세진암洗塵巖(세상의 번뇌를 씻는곡)이라 새긴 글씨가 비교적 크게 새겨있다. 아무도 모를 듯한 초서체로 흘려 쓴 글씨라 내가 알아볼 턱이 없다. 역시 한자 서체의 대가 도정 권상호 선생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호계虎溪와 세진암洗塵巖이라는 답을 주셨다. 알고 그리 보니 그리 보인다. 글자체가 수려하고 웅대하나 누가 쓰고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세진암洗塵巖


일주문역할을 하는 사찰의 경계인 호계교를 지나 여산폭포에서 세상의 번뇌를 씻어내고 비로소 정토(대웅전)에 이르는 절의 경계구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호계와 세진암, 여산폭포가 새겨진 바위 주변에는 청암사를 다녀간 일반인의 이름이 집중적으로 새겨있다. 일주문부터 대웅전을 향해 걸으며 만나는 석각을 차례대로 서술해 볼까 한다.

팔공산 도림사 월간 도리도리 201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