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천추寶藏千秋 돌도사와 떠나는 석각石刻기행
합천 연호사烟湖寺 함벽루涵碧樓 석각 ②
우암송시열의 석각
연호사 함벽루가 있는 뒤쪽 바위벽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함벽루 석각과 함께 작은 글씨로 기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새겨 놓았다. 함벽루 석각 끝에는 우암이라는 이름이 새겨있어 송시열이 쓴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우암의 낙관은 해인사 홍류동에 새긴 취치원 둔세시의 ‘우암서’와 필체가 비슷하다. 추측컨대 비슷한 시기에 쓰고 새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암 송시열의 친필인 함벽루 석각은 석벽을 평평히 깎아 내고 그 위에 세로로 힘차게 글을 쓰고 음각으로 새겼으며 우측에는 함벽루기涵碧樓記의 내용이 요약되어 새겨 있고 석각 위에는 닷집을 끼워 넣어 보호각 역할과 함께 함벽루 석각을 은은히 돋보이게 하고 있다.
글자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평가하기 어렵지만 초보가 보더라도 힘차고 멀리서 도 눈에 띄게 큰 글씨로 새겨있다.
함벽루涵碧樓
조선국숭정후신유朝鮮國崇禎後辛酉 군수풍양조지항중건郡守豊壤趙持恒重建
이복치시창세갑지회而復値始刱歲甲之回
우유목철표지지리사적구재서기운又有木鐵漂至之異事蹟具載叙記云
우암서尤菴書
조선 숭정(1628~1644)후 신유년(1681년)에 합천군수 풍양사람 조지항이 중건하였다.
이는(高麗忠肅王 辛酉年1321년에) 처음 창건한 후, 햇수가 마침 다시 신유년辛酉年(1681년)이 돌아온 해이다. 또한 목재와 철사가 떠내려 와서 (강변에) 이른 기이한 일이 있어 서문叙記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암서尤庵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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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계곡의 우암서尤菴書 함벽루의 우암서尤菴書
송시열의 함벽루기에는 합천군수 조지항이 중건하였으며 그의 부탁으로 기문과 석각을 남겼다고 되어있다. 현제 조지항의 이름 석각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항趙持恒 군수는 무인戊寅1638년(인조 16)생으로 1680년 합천군수로 있으면서 함벽루를 중창하고 함벽루에 기문을 남겼다.
송시열宋時烈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607(선조 40)∼1689(숙종 15)동안 활동하였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1689년 장희빈이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문장은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강석정의 사랑방 http://blog.daum.net/qhwnd128/16905659
팔공산 도림사 월간 도리도리 2017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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