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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領側成峰
  •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입 벌려 웃지않으면 바보!!
  •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 有仙則名 산은 높고낮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을 날린다.
석각 石刻

합천 연호사烟湖寺 함벽루涵碧樓 석각 ③

by 검은마루 2018. 1. 18.

함벽루涵碧樓 성명姓名석각 ③


연호사 함벽루涵碧樓 암벽에는 방문했던 여러 이름들이 새겨있는데 이름들을 살펴보면 이일운李一運 황윤동黃潤東 최한승崔翰升 최완현崔琓鉉 이유익李儒翊 기妓금파錦坡 신종창申宗昌 이성화李性和 이봉래李鳳來 정두은鄭斗殷 이경상李景祥 윤봉석서尹鳳錫書 이진재李晉在(1857합천군수 父이희준 祖父이태영) 이익재李益在(1858 담양, 광주부사父이희갑李羲甲 祖父이태영李泰永), 이학재李鶴在 이승백李承白 백홍기白鴻基 박용희朴用熙 김흥제金興濟 이민희李民僖 이범주李範疇 이은용李垠鎔 이범직李範稷 통사統使박기풍朴基豊 장석윤張錫胤 조중익趙重翊 임치재任穉宰  이인고李寅皐 박종룡朴從龍 이석두 반룡기 조진익趙鎭翼 子조두순趙斗淳 이학연李鶴秊 민영선閔泳璇 문봉성 노상오 문사선文士善  등이 보인다.

 

통사統使 박기풍朴基豊


1777년 무과에 급제, 1780년에 선전관이 되었고, 1800년 함경북도절도사, 1807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도총부부총관으로 양서순무중군兩西巡撫中軍 겸 선봉장이 되어 청천강 이북의 각 고을을 회복하였다.
이듬해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겸하여 정주성을 네번이나 공격하여 전세는 유리하였으나 그의 성격이 유약하여 규율을 잡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였다.
그 뒤 1813년 좌포도대장 · 경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815년 이후 좌우포도대장, 1821년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1823년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3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지낸 1821년 연호사를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조진익 조두순 성명석각     
아들 조두순의 시문이 누각에 걸려있다.

 

조진익趙鎭翼(1811년) 조두순趙斗淳
함벽루기를 쓴 조진익과 아들 조두순의 시문이 누각에 걸려있다. 누각과 암벽에 동시에 나타나는 유일한 인물들로 부자지간이다.
 

 
  • 대구 칠성동의 지명을 탄생케 한 이태영 관찰사의 손자들이다.
    이진재李晉在(1857 합천군수 父이희준 祖父이태영)
    이익재李益在(1858 담양, 광주부사 父이희갑李羲甲 祖父이태영李泰永)
    이학재李鶴在 이승백李承白 윤봉석서尹鳳錫書
     

 

 

 

 
  • 합천군수 이학연李鶴秊  갑신이군수래甲申以郡守來1884 子 경성 준성 민성  

 

 

          







 

 기와공으로 보이는 문사선의 이름도 보인다.                                    민영선 1906년 경상도 관찰사
 좌간와즙左官瓦葺 문사선               

 

 

 







 

      

이범주李範疇 이민희李民僖                                                            이범직李範稷 이은용李垠鎔
     
이범주李範疇(1879생)는 전주인으로 1902년 4월 29일부터 9월 28일까지 5개월간 진주군수를 지냈다. 1900년 승훈랑에 제수되고, 1901년 능주군수, 1902년에는 통정대부·흥양군수·진주군수 등을 맡았다. 1905년 1월 중추원의관에 임용되었고, 비서원승을 거쳐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재임하면서 1905년 7월에 일본국시찰사무원이 되어 일본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같은 해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10월 농상공부협판이 되었고, 이듬해에 서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그해 11월 궁내부협판에 이어, 1906년 봉상사제조를 역임했다.

 이민희李民 1907년6월25일부터 1908년3월까지 지방위원(합천군), 합천군 학무위원으로서 관과 민의 중간 조정역 을 맡았다, 1907년 합천실업전습소를 설립 운영. 1922년 합천소비조합 평의원. 1929년 신간회新幹會 합천지회장 등 합천에서 재력가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은용李垠鎔 친일파인 을사오적의 한사람으로 1887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감찰사, 황해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 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를 조인에 협조했다. 나중에 법부대신, 판돈녕부사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 조약에 찬성, 조인에 서명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

이범직李範稷은 1901년 10월부터 1902년 7월까지 합천군수를, 1905년 1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안의군수를 각각 지냈다.

 

 

기妓 금파錦坡
      

 


이곳에도 어김없이 기생의 이름이 등장한다. 석각으로 만 본다면 조선시대 선비 다음으로 높은 위치와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계층으로 보인다.

 

 

연호사 법당 후면 축문祝文
연호사 법당 후면 암벽에는 1928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천도축문이 새겨있다.
연호사에 토지를 시주한 시주단월의 축원문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한 축문으로 보이며 연호사 사찰에서 새긴 것으로 기록이 되있다.
 

 


白氏
효녀중녀孝女仲女 
이토단성以土檀城 연호사의 토지를 시주한 단월입니다
유기관화有期觀化 다시 볼 날을 기약하며 
아사유부我死有付 내가 없더라도 영원히 모실 수 있는 것은
용천량위用薦兩位 돌아가신 부모님을 천도하고
형자필향亨子苾香 향을 사라 제를 올리는 일입니다.
주산지양珠散之焬 옥구슬을 뿌려 공양을 올립니다.    
무진윤이월일戊辰閏二月日(1928) 봉헌우奉獻于 연호사烟湖寺 

 

 

합천 연호사 석각을 송시열이 쓴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보았다. 연호사를 방문하는 이들의 궁금증을 조금 풀어드리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합천읍내를 가르는 정양호의 도도한 흐름이 지금도 끊기지 않고 시민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 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강석정의 사랑방 http://blog.daum.net/qhwnd128/16905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