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의 화려한 시석각詩石刻의 세계
1500년생 선비 세분. 퇴계 이황, 요수 신권, 갈천 임훈
거북바위의 이름을 놓고 한양에서 친정 거창에 내려온 퇴계 이황은 기존 수송대愁送臺 이름이 우울하다며 수승대搜勝臺로 고칠것을 제안하고 시와함께 수승대 이름을 써 보낸다.
요수 신권은 한양에서 내려온 대 석학 께서 이름을 내려주심에 감사의 표현으로 시를짓고....
한편 지역 토박이인 갈천 임훈은 “자기 고향도 아닌데 왜 서울에서 온사람이 맘대로 이름을 바꾸노...”하며 살짝 아쉬운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거창지역에 터를 잡고 사는 요수 신권과 갈천 임훈의 후손들은 거북바위에 서로 자기 문중의 조상을 찬탄하는 시를 새겨 거북바위에 난립하게 된다.
수승대 거북바위에는 이황의 수승대 명명시와 이황의 시운을 차운한 차운시가 13편(수승대명명시 정온 김창흡 신수이 임석형 한복연 박영화 조응경 신재익 신성진 신인명 신대성 신도명), 임훈의 시와 차운시가 3편(퇴계소감 임석형 한복연), 신권의 시와 차운시가 3편(퇴계소감 요수정주련 퇴계차운), 조영석, 한복연의 시가 새겨있다.
퇴계선생과 갈천선생, 요수선생이 거북바위(암구대)를 주제로 시를 주고받았다. 퇴계선생의 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는 수승대 거북바위 서편 정면에 붉은 글씨로 각이 되어있다. 시 석각石刻에 ‘경오庚午(1810) 四月日 한복연서韓復衍書’ 라는 각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3백년이 지난 후대의 한복연군수가 쓴 것이다. 퇴계선생과 갈천선생의 시 좌우에 옛 명칭 수송대와 새로운 이름 수승대를 나란히 새기고 갈천장구지대葛川杖屨之臺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 새겨 넣은 것이다. 이는 한복연(1810년 안의현감安義縣監)현감이 임훈의 후손인 이 지역 용암임석형 (1751~1816)의 부탁을 받고 글을 써주었으며 이를 임석형이 새긴 것이다.
동편 바위면에는 신권선생의 후손인 황고黃皐 신수이(1688~1768)와 안음현감으로 있던 조영석趙榮祏이 더 먼저 암구대에 시를 새겼다. 시기적으로만 보면 임석형이 새긴 시기보다 앞선 것이다.
거창신씨 집안의 신수이는 당시의 현감이었던 조영석(1686~1761)과 손잡고 구연서원의 관수루(1740)를 짓고 또 암구대에 신권선생을 노래하는 시도 남겼다. 조영석군수는 안음현(현 함양군 안의면)을 떠나며 계해년(1743) 4월에 수승대의 거북바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신수이 선생과의 친분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수승대 바위에는 한복연 현감이 새긴 1810년보다 훨씬 이전의 시 석각들이 즐비하다.
그래서인지 후대인 1810년 퇴계와 임훈선생의 시, 특히 각을 한 당사자인 임석형과 한복연의 차운시를 가장 잘 보이는 면에 가장 큰 글씨로 새겨 넣었다.
글씨가 크고 선명하며 좋은 자리에 위치한 석각은 후대에 새긴 것으로 보면 된다.
이로보아 후대에 은진임씨집안의 임석형과 당시의 한복연군수가 기존에 새겨있던 신권선생관련 다른 시석각들 보다 크게, 수승대 한 복판에 퇴계 이황의 시와 나란히 새김으로서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고 이후 수승대의 주인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씨와 임씨간의 논쟁 한복판에 조영석과 한복연이라는 시기적으로 각기 다른 군수가 함께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관의 권력을 지원받아 행정을 처리하는 일이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시1 갈등의 시발점, 퇴계이황의 개명改名시
수승대搜勝臺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 퇴계선생이 이름지어준 곳
수승명신환搜勝名新換 수승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봉춘경익가逢春景益佳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아름답구려.
원림화욕동遠林花欲動 저 멀리 숲에선 꽃망울 터져 오르고
음학설유매陰壑雪猶埋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미우수심안未寓搜尋眼 수승대를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유증상상회惟增想像懷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타년일준주他年一樽酒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거필사운애巨筆寫雲崖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퇴계이선생退溪李先生
수송대愁送臺 갈천장구지대葛川杖屨之臺 갈천선생이 지팡이 집고 신발 끌던 곳
화만강고주만준花滿江皐酒滿樽 꽃이 가득한 강 언덕에 술이 가득한 술동이
유인연몌만분분遊人連袂謾紛紛 소맷자락 이어잡고 흥에 취한 사람들
춘장모처군장거春將暮處君將去 저무는 봄빛 밟고 그대 떠난다니
불독수춘수송군不獨愁春愁送君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갈천임선생葛川林薰先生
경오庚午(1810) 四月日 한복연서韓復衍書
시2 요수신선생樂水愼先生
요수 신권선생의 화답시는 수승대 거북바위 북편 구연서원을 마주하고 있는 바위면에 자리잡고 있다.
두 편의 시석각으로 퇴계선생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시와 퇴계선생 시의 운을 차운한 차운시가 새겨있다.
‘요수신선생’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생전에 짓고 후대의 후손이 새긴 것으로 추측된다. 본인 스스로 선생을 같다 붙이지는 않으니….
임훈의 시가 수승대 정면 복판에 새겨진 반면 신수이의 시는 북편에 얇은 글씨로 각이 되어있다. 시기가 오래되었다는 반증이며 마모가 심하여 흐릿한 윤곽으로 글자의 배를 맞춰 시를 알아볼 수 있다.
요수樂水신선생愼先生 가정嘉靖계묘癸卯 정월正月 제생諸生각刻이라 기록되어있다.
가정연호는 1522 ~ 1566년이고 그중 계묘년은 1543년이다. 1543년은 퇴계가 수승대의 이름을 새로 지어 시를 보내준 해이니 신권이 화답시를 남긴 바로 그해에 각刻을 한 것으로 보인다.
봉퇴계선생수승시奉退溪先生搜勝詩
위소대변로爲掃臺邊路 수승대 옆길을 쓰는 것은
서망화가림庶望華駕臨 그리던 이(이황)가 오길 바람인데
시래인불지詩來人不至 시는 왔으나 사람은 오지 않아
무의독등림無意獨登臨 무심히 홀로 대에 오르네
퇴계선생의 시를 차운한 화답시도 새겨져있다.
퇴계선생 수승대 시운을 차운하면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임학개증채林壑皆增采 골짝에는 채색이 더해가는데
대명조석가臺名肇錫佳 대의 이름 비로소 밝히니 아름답구나
승일준전치勝日樽前値 좋은 날에 술동이 앞에 차리고
수운필저매愁雲筆底埋 구름 같은 근심은 붓 끝에 묻으려네.
심하진중교深荷珍重敎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수절한망회殊絶恨望懷 그리운 회포를 끊으려 하네
행진요막추行塵遙莫追 속세에 물들어 거닐다 이르지 못하고
독의노송애獨倚老松崖 홀로 우거진 솔 벼랑에 기대어 보네.
요수신선생樂水愼先生 가정嘉靖계묘癸卯 정월正月 제생諸生각刻
시3 하구정下鷗亭 조응경趙應卿
퇴계선생시의 운을 차운한 조응경(1487-1549)안의현감의 시가 남쪽면에 새겨있다. 수승대에 새겨진 석각시중 가장 오래된 차운시이며 임씨나 신씨의 시가 대부분인 수승대에서 조씨가 쓴 시여서 눈에 띈다.
차운은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차퇴계이선생운次退溪李先生韻
수송칭수승愁送稱搜勝 이곳 수송대는 수승대라고도 부르니
신명배구가新名倍舊佳 새이름 전이름보다 배나 아름답네
병광첨영발炳光添影發 운무는 물속그림자 뒤로 피어오르고
선적긍진매仙跡肯塵埋 신선의 자취 속세티끌이 묻으려 하네
영기비범골英氣非凡骨 영웅의 기상은 범인의 자질이 아니니
청표진아회淸標儘雅懷 청명함의 끝에 아름다운 생각 머무네
상대시구묘霜臺時句妙 상대(이황)가 지은시 참 묘하기도 하지
유여사운애留與寫雲崖 절벽에 새겨진 시를 서서 읽어 보네
하구정下鷗亭 조공趙公 가정기해嘉靖己亥(1539)지현知縣(현령)
조응경의 시 끝부분에 연호를 “가정기해嘉靖己亥지현知縣”으로 새겼다. 기해년은 1539년으로 퇴계선생의 개명시를 지은 시기인 1543년보다 4년 앞선 시기이다.
퇴계의 개명改名시가 나오지도 않은 시기인데 어떻게 차운시가 나올 수 있는가!
이를 거창문화원에서 나온 《명승 수승대》의 오필제 선생님은 조응경이 안음지역에서 현감을 지냈던 시기를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1542년에 안음현감에서 물러나면서 수승대에 대한 퇴계선생의 개명시를 보고 차운시를 남겼으며 후미에 연호는 안음현감으로 재직할 시기를 기록하고 직함인 지현知縣을 새긴 것으로 본 것이다.
조응경趙應卿
자字는 경노庚老 호號는 하구정下鷗亭으로 1487년(정미생) 조선 성종 18년에 태어나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단성, 안의, 예안의 3읍의 현감을 지냈으며, 1549년 3월 3일에 졸하였는데 향년 62세이다.
시4 죽헌竹軒 조선생曺先生
죽헌 조숙 선생의 시 두편이 수승대 거북바위 상단에 박혀있다. 초록색 대리석에 얇게 선각으로 새긴 시는 화강암을 파내고 그 속에 녹색 대리석을 끼워 넣었다. 주변엔 죽헌의 후손으로 보이는 창녕조씨의 이름이 즐비하게 새겨있어 이들에 의하여 새겨 넣어진 것으로 보인다. 총탄자국으로 보이는 상처와 함께.
경로연운敬老宴韻 - 경로잔치에 읊다
암화간초염춘광岩花澗草艶春光 바위 꽃 개울 풀 고운 봄빛에
환백초요취수향歡伯招邀醉睡鄕 초대받은 늙은이 취해 잠드네
대하고음휘채필臺下高吟揮彩筆 대 아래서 크게 읊으며 붓 휘두르고
사두심작의사양沙頭深酌倚斜陽 하얀머리 한껏 마시며 석양에 기대네
혜간록의점앵무兮看綠蟻霑鸚鵡 쌀알 뜬 술 앵무 잔에 뜨는 것 보고
시견청아지봉황時見靑娥指鳳凰 때로 고운 여인 봉황소 부는 것 보네
일길진양탐승경日吉辰良探勝景 길한 날, 때는 승경을 찾기도 좋아
엄적반석요미앙淹笛盤石樂未央 피리소리 맴도는 반석에 즐거움 그치지 않네
차퇴계운次退溪韵
가객한음처訶客閑吟處 시객들 한가롭게 읊조리던 곳
계산일석가溪山一夕佳 내와 산의 저 경치 아름답구나.
준앵청흥원樽罌淸興遠 술두루미 맑은 흥은 멀어만 가고
태소단비매苔蘇短碑埋 청태 낀 작은 비는 묻혀만 가네.
숙기훈화수淑氣薰花髓 맑은 기운 꽃향기는 몸에 스미고
화기입아회和氣入我懷 부드러운 기운은 나에게 품겨드네.
신시전불후新詩傳不朽 새로운 시 길이 전하여
유체공마애留滯共磨崕 깎아지른 벼랑처럼 남아 있으리.
죽헌조선생竹軒曺先生 戊午 00 刻
《명승수승대 - 오필제》거창문화원
시5 동계桐溪 정온鄭蘊
관답증망호慣踏曾忘好 버릇처럼 거닐 땐 좋은 줄 몰랐는데
요사시각가遙思始覺佳 멀리서 생각하니 아음다움 비로소 알겠네
수종용택장水從龍宅壯 용문에서 흐르는 물 장엄도 하고
람접호음매嵐接虎陰埋 아지랑이 피어나서 호음산에 묻혀있네.
단격유어용湍激游魚湧 굽이치는 여울에서 물고기는 힘차게 헤엄을 치고
송선노도회松先老嶋懷
하시선라망何時鮮羅網
□□구태애□□舊笞崖
無每龍□怡
重□書洞佳
松窓龜背老
波浸不腹埋
景物森□□
□□拾滿懷
覺來衣書濕
□似臥陰崖
동계정선생재대정작桐溪蘊先生在大靜作(1615)
경오오월일庚午五月日 정경서鄭璟書(1870)
병오육월일주손태□중각丙午六月日冑孫泰□重刻(1906)
퇴계선생시의 운을 차운한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시이다.
시의 윤곽으로 보아 퇴계선생 차운시이다. 두편 연속으로 나온다. 끝부분에 재대정작在大靜作이라 새겨있어 1615년경 제주도에 10여년 간 유배시 제주도 대정리에서 지었다는 시이며 후대에 석문을 남겼다. 1행과 2행에서 ‘버릇처럼 거닐 땐 좋은 줄 몰랐는데 멀리서 생각하니 아음다움 비로소 알겠네’ 라고 소회를 적고 있어 유배지에서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로 보인다.《명승 수승대 - 거창문화원 오필제》
글씨마모가 심하고 이끼가 많이 끼어있어 판독이 어려운것같습니다. 석각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지도편달 부탁합니다.
시6 차운시次韻詩의 세계 - 용암 임석형(1810년경)
퇴계선생과 갈천 임훈선생이 주고받은 시에 후손이 차운한 시가 암구대 서편 정면에 새겨있다. 서남방향 위편에 퇴계선생과 임훈선생의 차운시와 한복연군수에 대한 감사의 차운시, 용암 임석형의 소감시 4편이 나란히 새겨있다. 임석형이 쓰고 새긴 것이다. 갈천 임훈선생의 후손이다 보니 퇴계선생과 임훈선생, 한복연 군수의 시만 차운하고 요수신권선생의 차운시는 보이지 않는다.
퇴계선생시의 운을 차운하면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경차퇴계선생운敬次退溪先生韻
수승신명개搜勝新名改 수승으로 이름을 고치니
계산배익가溪山倍益佳 산과 계곡이 더욱 아름답도다
연광만학쇄煙光滿壑鎖 희미한 달빛 골짜기에 가득 차고
대영도담매臺影倒潭埋 대의 그림자 거꾸로 땅에 묻혔네
표경망진려標景忘塵慮 경치가 드러나니 세상근심 잊고
임풍창상회臨風暢爽懷 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상쾌하다.
선생유촉지先生遺躅地 선생께서 남기신 자취를 따라서
종일보단애終日步丹崖 종일토록 붉은 벼랑을 걷네
갈천선생의 시를 차운하면 1행 준樽, 2행 분紛, 4행 군君이 된다.
경차갈천선생운敬次葛川先生韻
삼국하년석작준三國何年石作樽 삼국의 어느 해에 돌에 술통 만들어
등임사개공분분登臨使价共紛紛 사신들 그곳에 올라 함께 어지러이 놀았네
수송대명양유이愁送臺名良有以 수송대란 이름에는 까닭 있으니
선생해의시제군先生解意示諸君 선생께서 뜻을 풀어 제군들께 보이셨도다.
시7 유감有感 - 느낌있네! 용암 임석형
임석형이 안의현감 한복연의 시를 차운한 차운시와 지신의 소감을 적은 시가 나란히 새겨있다.
한복연의 시를 차운하면 1행 수愁 2행 류流 4행 구區가 된다. 그런데 임석형이 쓴 차운시에서는 4행 끝자가 구區가 아니라 주州로 새겨져 있다. 차운시의 형태를 취했다면 4행 마지막에는 구區가 와야 한다. 그런데 구區는 4행 두 번째 글에 들어가 있다. 새기던 사람이 착각했던지 시의 해석상 끝에 와야 할 글자를 편의상 두번째에 배치한 것인지 알 순 없다.
경차한후석상운敬次韓侯石上韻
성초하일송리수星軺何日送離愁 성초(사신이탄 수레)에 어느 날 근심을 떠나보내니
천고명파부진류千古鳴波不盡流 오랜세월 흐르는 물결 다함없이 흐르네
퇴로준명상상후退老捘名想像後 퇴계선생이 내린 이름을 머릿속으로 그려본 후론
령구수승단남주靈區搜勝檀南州 신령한 남섬부주에서 수승단이 되었네
각양刻兩 선생시유감先生時有感 두선생(퇴계, 갈천)의 시를 각하고 나서 느낌을 적다
퇴옹당일명명유退翁當日命名留 퇴계선생이 지은 이름 남아있고
갈로평생장루유葛老平生杖樓遊 갈천선생은 평생 지팡이 잡고 노닐던 곳
종차계산지유주從此溪山知有主 이로부터 계곡과 산이 주인 있음을 알고 보니
대암무어수장류臺巖無語水長流 대의 바위는 말이 없고 물은 길게 흐르는구나
용암임석형근고龍巖林碩馨謹稿
임석형林碩馨 1751년 ~ 1816년
자는 원경遠卿이고, 호는 용암龍巖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거주지는 경상남도 함안이다.
만년에 용암정龍巖亭에서 생활하며 세속을 초월한 취미를 가지고 세상을 즐겨 영호남 선비들로부터 ‘원학주인猿鶴主人’으로 일컬어졌다.
문집으로 한복연韓復衍 ‧ 김인순金麟淳 ‧ 이교원李敎源 ‧ 한계중韓啓重등과 주고받은 《용암유집龍巖遺集》이 전한다.
시8 송간松澗 임동혁林東赫
거북바위 서편 해가 잘 들지 않는 응달쪽 상부에 송간 임동혁의 시 두 편이 새겨있다. 퇴계와 갈천의 차운시이다. 퇴계선생시의 운을 차운하면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근차퇴계선생운謹次退溪先生韻
의구대공재依舊臺空在 예처럼 대만 남아있고
여금물색가如今物色佳 지금은 물색이 이처럼 아름 답구나
우량청초몰雨痕靑草沒 비 내린 흔적에 들풀은 푸르고
시각벽태매詩刻碧苔埋 새긴 시는 푸른 이끼에 묻혔네
적우선현적逖矣先賢跡 아득한 선현의 자취는
유재소자회悠哉小子懷 유유히 후손의 회포라
상심회수처傷心回首處 상심으로 머리를 돌려 본 곳은
취석석문애冣惜石門崖 너무도 애석한 돌문 벼랑일세
갈천선생의 시를 차운하면 1행 준樽, 2행 분紛, 4행 군君이 된다.
근차갈천선생운謹次葛川先生韻
생유기암불유준生有奇巖不有樽 기암 밑 동이엔 술은 남았고
동서유객거래분東西遊客去來紛 동서로 노니는 유객들 오가기 바쁘네
수권수송상분처愁眷愁送相分處 시름으로 돌아보고 보내며 서로 나뉘는 곳
상고상금기사군傷古傷今幾使君 예나 지금이나 걱정하는 관리 몇이더냐
송간松澗 임공林公
송간松澗 임동혁林東赫은 1657(정유)년에 출생하여1734(갑인)년 78세에 졸 하였다. 자는 혁연赫然, 호는 송간松澗이다.
《명승수승대 - 오필제》거창문화원
시9 노산老山 신공도명愼公道明
경차敬次
화림삼동경花林三洞景 화림삼동의 경치는
수승최청가搜勝最淸佳 수승이 가장 맑고 아름다워라
무권산용로霧捲山容露 안개 걷히니 산모습 드러나고
계훤명어매溪暄鳴語埋 개울 시끄러워 까마귀소리 묻히네
선옹당일촉先翁當日躅 선대어른 당일 자취요
퇴로석년회退老昔年懷 퇴계선생 옛 회포라
불진임류완不盡臨流玩 물가 임하여 다 즐기지 못해
기앙갱상애技卬更上崖 지팡이 의지해 다시 벼랑에 오르네
노산老山 신도명愼道明은 황고 신수이의 아들로 1713년에 태어나 1794년에 졸하였다.
《명승수승대 - 오필제》거창문화원
시10 승지承旨황강黃岡신공성진愼公性眞 한림翰林노강老岡신공인명愼公認明
퇴계선생시의 운을 차운한 두 개의 시가 남쪽면에 새겨있다. 요수신권의 후손으로 황고신수이의 자손인 부자 노강 신인명과 황강 신성진의 퇴계차운시이다.
차운은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삼동다명승三洞多名勝 삼동지방에는 빼어난 곳이 많지만
시대등일가是臺等一佳 수승대가 그중 가장 아름답다
유관인불□遊觀人不□ 놀이구경하는 사람 0000 않고 盤 然
전준고하매前浚臯何埋 앞 깊어 언덕이 묻히네
석백삼한색石白三韓色 돌이 하얀 것은 삼한의 색깔이요
풍청만고회風淸萬古懷 맑은 바람은 만고에 그리움이네
퇴옹도운완退翁道韻宛 퇴계노인의 도의 운치가 완연하니
음롱의송애吟哢倚松崖 암벽의 노송에 기대어 읇조리네
승지承旨황강신공성진黃岡愼公性眞
수송대정척愁送臺亭尺 수송대와 정자는 지척이요
형구경공가形龜景拱佳 거북형상이 경관을 도와 아름답다
□천성회폭□川盛匯瀑 흐르는 물이 모여 폭포되고
포석반부매鋪石半浮埋 평평한 반석 반은 뜨고 묻혔도다
백대인륜오百代人輪奧 백대의 사람들 깊은 오지로 알았고
삼한사뇌회三韓使惱懷 삼한의 사신들은 고뇌를 품었다지
간금명유승看今名愈勝 오늘에사 이름보니 수승이 더욱 낫고
선원재동애先院在東崖 선조의 서원은 단애 동쪽에 있다네.
한림翰林노강신공인명老岡愼公認明
《명승수승대》거창문화원
한림翰林 노강老岡신인명愼認明 1723 ~ 1781
처음 이름은 인명仁明인데 영조대왕이 인명認眀으로 바꾸었으며 자字 택초宅初 호는 노강老岡이다. 신수이愼守彛의 아들로 1723년에 태어나 1781년에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1767년에 한림, 1768년에 자인현감을 거쳐 1777년에 정언에 이르고 1780년에 지평을 지냈다.(한림翰林-조선시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달리 이르던 말)
승지承旨 황강黃岡신성진慎性眞 (1752 ~ 1830)
1752년에 황고 신수이慎守彛의 손자로 태어나 순조 경인(1830)에 78세로 몰하였다. 호는 황강黃岡이며 정조 정유(1777)에 시행한 식년전시 문과방 을과에 급제하고 남포현감藍浦縣監, 양산군수梁山郡守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인명認明) 병간호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이는 효성과 더불어 백성을 사랑하여 철종 8년(1857) 정사에 정려가 내려졌다. 구연서원 효열각 안에 현판을 가로로 하여 상단에 “효자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신성진지려(孝子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 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慎性眞之閭)”라 음각하고 그 하단에 작은 글씨로 기문을 새겼다.
시11 구암龜巖 신재익愼在翼
요수 신권의 후손인 구암신재익의 퇴계선생 차운시가 수승대 서편 그늘진 곳에 새겨있다.
구암신재익의 퇴계선생 차운시이다. 1행 가佳, 2행 매埋, 4행 애崖이다.
위기대왈승謂其臺曰勝 이대를 일러 가장 빼어난 경치라하니
천재득명가千載得名佳 천년에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네
련면천여세鍊面天如洗 낮을 씻으니 하늘이 깨끗하고
탱두지불매撑頭地不埋 머리 드니 땅이 묻히지 않네
도옹상상처陶翁想像處 퇴계노인이 그리워하고
연로창망회淵老悵忙懷 삼연선생이 창망히 그리던 곳
천석나무주泉石那無主 냇가의 바위에 어찌 주인이 없겠는가
선정재취애先亭在翠崖 선조의 정자가 푸른 언덕에 있네
구암龜巖 신재익愼在翼 근차謹次(요수 신권의 9세손으로 자는 치홍이고 호는 구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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