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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領側成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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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 거창 수승대 암구대

거창 수승대 암구대 석각 1 - 거북바위 전경

by 검은마루 2021. 12. 25.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시간날때마다 틈틈이 수승대를 찾아 수승대의 구연암(암구대)의 아름다움과 석각에 깃든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참고자료로 《위천면지》《명승수승대 - 오필제》거창문화원《조선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최석기) 를 참고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 있어 수월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으나 잘못 집필된 내용과 자료들도 꽤 보였습니다. 나름대로 수정하여 블러그에 올립니다. 나름 관심있는 아마추어 전문위원들을 위하여...

 

 

거창 수승대

수승대搜勝臺가 위치한 곳은 거창의 원학동으로 조선시대엔 안의삼동으로 불렸다. 거연정, 농월정등 정자문화가 즐비한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용추사가 있는 함양의 심진동尋眞洞, 수승대가 있는 거창의 원학동猿鶴洞을 안의삼동安義三洞으로 불린다. 덕유산을 그 뿌리로 벋어 내려오다 세 갈래로 갈라져 안의 삼동을 구성하고 황금원숭이의 전설을 담고 있는 금원산, 월성계곡이 뻗어 흐르는 원학동 한 구비에 수승대가 자리 잡고 있다. 맑은 물과 정자, 서원, 거대한 거북바위가 계곡의 풍광과 함께 어우러지는 명승지로 2008년 명승53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옛날에는 지역 선비들의 쉼터이자 탁마의 장소이기도 했다. 수승대에는 구연서원, 관수루, 암구대 등이 있고 계곡 건너편으로 별당격인 함양재와 요수정이 있다.

 

수승대搜勝臺의 최초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1. 근심을 보내는 빼어난 절승 - 수송대, 수승대

수승대搜勝臺의 최초이름은 수송대愁送臺였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 무주에는 백제에서 신라로 통하는 나제 통문이 있으며 거창지역 역시 신라, 백제의 경계지역으로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다. 백제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 사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수愁, 보낼송送자를 써서 수송대라 하였으며 혹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보내고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수송대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수승대搜勝臺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안의현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수송대愁送臺의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수승대라 고칠 것을 권하는 시詩를 보내면서 수승대로 지금껏 불리고 있다.

 

수송대愁送臺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금릉金陵남공철南公轍은「풍패정기風珮亭記」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수승대搜勝臺 일명 수송암愁送巖이라. 삼한 시에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였다. 사신들도 연달아 이르렀는데 빈객이 모두 여기서 전별하던 곳이라. 이로 인하여 이름으로 하였다.(搜勝臺一名愁送巖 三韓時 數發兵相攻 使者冠盖相望 而賓客皆餞別於此 故仍以名云)” (1800년대中 )

명미당明美堂 이건창은「수승대기搜勝臺記」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1880년대中)

“이 대의 옛 이름은 수송愁送이나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는 알지 못한다. 혹 이르기를 신라 백제 때 양국 사신이 여기서 서로 헤어지며 번번히 그 시름을 이기지 못하므로 칭하게 되었다.(臺舊名愁送 不知其所自 惑云當新羅百濟時 兩國之使 相送于此 輒不勝其愁 故以稱)”

 

수승대搜勝臺

『퇴계문집』의「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안음 고현에 바위가 물가에 임해 있는데 속명이 수송대愁送臺이고 천석이 너무 아름답다. 내 가고자 했으나 겨를이 없어 가보지 못해 한이 된다. 또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 해 싫어 수승으로 바꾸자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옳게 여기더라.(安陰古縣有石臨溪 俗名愁送臺泉石最佳 余於是行以不暇往見爲恨 亦嫌其名之不雅 欲改爲搜勝諸公皆肯之)”

 

남쪽방향

 

동쪽 방향 - 거북이 포효를 하고 있다.

 

북쪽 방향 - 얼음에 갖힌 거북바위

 

서쪽 방향 - 거북선이 실제했다면 모양이 이와 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