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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 거창 수승대 암구대

거창 수승대 암구대 석각 2 -이황, 신권, 임훈

by 검은마루 2021. 12. 27.

1500년 갑장. 이황, 임훈, 신권 선생이 살며 교유하던 곳

 

수승대를 이야기할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 선생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선생은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중성仲成, 호는 자이당自怡堂, 또는 고사옹枯査翁 · 갈천葛川이다.

거창군 북상에서 태어나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독서讀書하였고, 1553년(명종 8) 관천館薦에 의하여 사직서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집경전참봉으로 옮겼다.  1555년 고향에 돌아와서 80세가 넘은 노부를 봉양하여 1566년 관찰사의 추천으로 효행의 정려를 받았다. 

1573년 지례현감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고향인 거창군 북상면에서 1573년 갈천서당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안의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요수樂水 신권愼權(1501~1573)은 거창 신씨로 그의 호號가 요수樂水 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1540)년 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갈천임훈과 요수신권은 처남, 매부 사이로 신권의 처남이 임훈이었으며 임훈이 나이가 한 살 많았다. 퇴계선생 역시 신권과 나이가 같아 사는 지역은 다르지만 학문과 연륜으로 서로 교류를 하는 사이이다.

 

1543년 처가인 안의면 영송(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마을에 머물고 있던 퇴계 이황은 평소 수송대愁送臺란 이름이 너무 우울한 역사를 담고 있어 이름을 고칠 것을 제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급한 일로 조정에 올라가면서 신권을 만나지 못하고 대신 편지와 함께 시를 적어 보냈다. 수승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은 시였다.

 

 

수승명신환搜勝名新換 수승이라 이름 새로 바꾸니 

봉춘경익가逢春景益佳봄 맞은 경치는 더욱 아름답구나 

원림화욕동遠林花欲動 저멀리 숲에선 꽃망울 터져오르고   

음학설유매陰壑雪猶埋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미우수심안未寓搜尋眼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유증상상회惟增想像懷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타년일준주他年一樽酒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거필사운애巨筆寫雲崖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는 방문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수승대의 이름에 대한 애정을 시로 표현하여 보냈다.

 

 

갈천선생도 함께 시를 기다리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퇴계선생의 시를 차운한 것이 아닌 독자적인 시이다.

화만강고주만준花滿江皐酒滿樽 강 언덕에 가득한 꽃 술동이에 가득한 술 

유인연몌만분분遊人連袂謾紛紛 소맷자락 이어질 듯 흥에 취한 사람들   

춘장모처군장거春將暮處君將去 저무는 봄빛 밟고 자네 떠난다니   

불독수춘수송군不獨愁春愁送君 가는 봄의 아쉬움, 그대 보내는 시름에 비길까.  갈천葛川 임훈林薰

 

 

요수 신권은 퇴계선생을 기다리다 그는 오지 않고 편지만 온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위소대변로爲掃臺邊路 수승대 옆길을 쓰는 것은         

서망화가림庶望華駕臨 아름다운 그가 오길 바람인데   

시래인불지詩來人不至 시는 왔으나 사람은 오지 않아 

무의독등림無意獨登臨 무심히 홀로 대臺에 오르네

 

 

그리고는 퇴계선생의 시에 다음과 같은 차운시를 남겼다.

 

임학개증채林壑皆增采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가는데         

대명조석가臺名肇錫佳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니       

승일준전치勝日樽前値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수운필저매愁雲筆底埋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심하진중교深荷珍重敎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수절한망회殊絶恨望懷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행진요막추行塵遙莫追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독의노송애獨倚老松崖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이렇게 주고받은 시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이렇게 수승대라는 새 이름을 얻은 수송대(암구대), 곧 거북바위에는 세 선비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찾았던 선비들이 읊은 시문이나 이름 남기기 좋아하는 이들이 새긴 성명 석각이 빈틈없이 가득하다.

 

이 석각은 시를 주고받은 당시에 새겼다기 보다는 세분 모두 돌아가시고 한참후에 후손들이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