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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領側成峰
  •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입 벌려 웃지않으면 바보!!
  •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 有仙則名 산은 높고낮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을 날린다.
석각 가야산 홍류동계곡

가야산 홍류동계곡 최치원 둔세시와 차운시 석각

by 검은마루 2021. 11. 11.

최치원崔致遠성지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

1. 고운이 가야산으로 은둔하면서 지은 둔세시遯世詩

해인사는 신라 말 진성여왕의 발원과 최치원의  체취가 살아있는 사찰이다. 진성여왕은 대각간 위홍의 등신불을 기원하는 발원으로 두분의 비로자나불(883중화3년 계묘) 을 조성하여 해인사에 모셨으며, 해인사에 출몰한 도적들로부터 해인사를 지키다가 사망한 스님들을 위로하기 위해 최초의 위령탑(비석거리 길상탑 895 진성9년 )을 조성하고 그 탑 기록문을 최치원에게 쓰게 하여 기록된 지석이 지금껏 내려오고 있다.

최치원은 900년엔 해인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해인사선안주원벽기海印寺善安住院壁記를 써서 해인사에 대한 창건기록을 남겼으며 신라 말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개혁을 시도했으나 신분의 벽에 막혀 실패하자 스스로 가족과 함께 은둔을 결심하며 해인사를 찾았다(918년경).

해인사로 찾아들며 읊은 둔세시가 홍류동 계곡 평평한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지금은 그 글씨가 넉자정도만 남아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 둔세시遯世詩(은둔하면서 소회를 밝힌 시)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미친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릴까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 시켜 산을 감쌌네.

 

1579년 한강 정구가 기록한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최고운崔孤雲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 동안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又刻崔孤雲詩一絶於瀑傍石面 而每年霖漲 狂瀾盪磨 今不復可認 摩挲久之 依俙僅辨得一兩字矣)”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725년 정식이 쓴 〈가야산록伽倻山錄〉에는“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이다. 승려가 ‘시내 가운데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입니다(卽尤庵筆也 僧曰溪中石上 有孤雲親筆 而年久字剜 故移刻于此云)’”라고 되어있다.

2. 우암 송시열의 복각覆刻

이로 볼 때 1600년에서 1700년 사이 조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풍랑에 점차 마멸되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맞은편 암벽에다 최치원의 둔세시를 자신의 글씨로 다시 새겨 넣었다. 다시 새긴 암각문이 홍류동 계곡 맞은편 암벽에 전해 내려온다.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우암서尤庵書

3. 차운시次韻詩 

차운시次韻詩란 TV 예능프로에서 가끔 나오는 삼행시를 생각하면 쉬운데

다만 요즘의 삼행시는 시의 앞구절의 음을 맞추어 시를 짓는 반면

옛 선비들의 차운시는 7언절구에 맨 끝자의 음을 맞추어야 한다.

최치원의 둔세시는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이므로

1행, 2행, 4행 끝자의 음을 차운하면 만巒, 간間, 산山이 된다.

 

회암晦庵정혜定慧 스님(조선 1685 ~ 1741)의 시이다. 회암정혜 스님은 해인사와 증산면에 있는 청암사, 쌍계사(김천 증산면사무소, 폐사)에 주석하시며 많은 저서를 남기신 대 강백이시다.

1712년 선비 유척기가 해인사와 가야산을 다녀간 후 쓴 〈유가야기遊伽倻記〉에는 “한 늙은 승려가 ‘묘향산妙香山에서 와서 산 지 올해 75년째’라고 하는데, 신이한 풍모는 쇠하지 않았고 말도 막힘이 없다. 도를 깨달은 것처럼 보이는 그 승려는 이름이 정혜定慧라고 했다” 라는 대목이 있다. 1712년을 전후로 해인사에 주석하시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시기에 최치원 차운시를 남기신 것 같다. 바위에 새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해인사에 주석하던 시기에 세긴 것으로 추정되며 위의 시와 아래의 정혜 스님 시가 나란히 새겨져 있고 사각형 테두리를 함께 두른 것으로 보아 같은 이가 암반에 세긴 것으로 추정해볼 뿐이다.

문도고운입차만 聞道孤雲入此巒 고운(최치원)이 이 산에 들어왔다는 말 들었지만

부지영적의하간 不知靈跡依何間 신령스런 발자취 어디에서 머물었는지 알수 없구나

만장개안간심처 謾將開眼看尋處 느긋이 눈을 뜨고 그의 거처를 찾고자 하는데

동자유천정자산 動者流川靜者山 움직이는 건 물이요, 고요한 것은 산일 뿐.

회암晦庵 정혜定慧 근기謹記 회암 정혜가 삼가 기록하다.

 

3. 차운시次韻詩 

 

농산정이 있는 도롯가 암반에 두편의 차운시가 새겨있다. 많은분들게 자문을 구하여 두분의 번역을 함께 싫는다.

권연염삭협경만圈然炎削夾璚巒 깎아지른 산등성을 끼고

백도유천사양간百道流泉瀉兩間 여기저기 흐른 물이 한 골짜기로 쏟아진다.

욕축고운반불득欲逐孤雲攀不得 고운(최치원)을 따라잡고 싶어도 여의치 않으니

유공도처창공산遊筇到處悵空山 지팡이 닿는 곳마다 텅 빈 산이 서글프다.

불초자不肖子 공생工生 희羲  풀이 : 권상호

주조첨삭협경만 周遭尖削夾璚巒 사방이 뾰족하고 깍아지른 절벽 아름다운 산을 끼고 있으니

백도류천사양간 百道流泉瀉兩間 길마다 흐르는 샘물 두갈래로 쏟아지네

욕축고운반부득 欲逐孤雲攀不得 고운을 따라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어

유공도처창공산 遊笻到處悵空山 나그네 지팡이 이르는 곳마다 텅빈 산을 보고 슬퍼하네

목유자토생화 木有子土生華 (이화李墷-동래부사)  풀이 : 전일주

 

3. 차운시次韻詩

홍류동 계곡 농산정 안쪽 암반에 약간은 어설프게 새겨진 차운시가 있다.

얇은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차운시로 종이에 펜으로 습작하듯이 편안하고 부드럽게 써내려간 시이다. 얼핏 보면 가벼이 막 쓴 것 같지만 이 역시 화강암에 새긴 석문으로 일정한 깊이의 얇은 선으로 새겼기 때문에 더 난해한 각刻작업이었지 않나 생각해본다.

평면 바닥에 줄도 잘 맞지 않아 들죽날죽해 보이지만 최치원 둔세시를 차운한 7언절구의 흠모시이다. 아마도 선비들이 모임을 갔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곧바로 각 작업을 한 것 같다.

7언절구 4행시로 최영석崔永錫 을축乙丑(1865)년이라 쓰여 있다.

최영석崔永錫 乙丑 (1865)

오조번년입차만 吾祖番年入此巒 당시에 우리 선조 이 산에 들어오셔,

잔■백세고운간 残■百歲孤雲間

부앙지금천재하 俯仰至今千载下

■만유수불녹산 ■巒流水不鹿山 乙丑■■重修■

 

3. 차운시次韻詩

장백영의 시이다. 나무아미타불이 쓰여 있는 구선암 위쪽 도로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으며 백영장영석이란 관지款識가 새겨져 있다.

긍당肯堂 장백영張伯永 題

고운금부재孤雲今不在 고운은 지금 가고 없지만

령아관산춘令我管山春 나로 하여금 춘산을 주관케 하네

재현도객載玄都客 몇 년 신선세계에서 노닐던 나그네

만년홍동인萬年紅洞人 오랫동안 홍동인으로 남고싶네.

 

3. 차운시次韻詩

환경 스님의 절승대가 있는 도로에서 산쪽으로 나지막한 바위에 희미하게 차운시가 한편 새겨있다. 정말 연구목적이나 미친(?) 사람 아니면 찾기 힘든 글씨인데 서체는 평범하고 바위에 실선으로 새긴 선각線刻 시이다.

사진을 찍고 시의 전문을 파악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는데 수십번을 왕복하는 수고를 더한 후에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차운시의 주인공은 백영伯永장석윤張錫胤 으로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1798년 현풍 현감에 재직하였을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긍당肯堂 장석윤張錫胤백영伯永 차고운시次孤雲詩

촉파궁창진상만觸破穹蒼眞上巒 신선이 사는 곳 인가,

도목은한주인간倒沐銀漢走人間 마음을 씻고 거닐다

지금첩석명유향祗今疊石鳴遺響 영원히 남을 교훈의 말씀,

계원문성은재산桂苑文星隱在山 문성(최치원)은 계원필경을 이산에 숨겼네.

홍류동 주변 많은 바위에는 가야산을 순례한 많은 이들의 이름과 기록이 있다. 수없이 쓰여진 이름이나 기록들은 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담겨있다. 환경훼손과 낙서, 혹은 개인의 복을 비는 기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조종祖宗이자 신라이후 우리 문인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최치원 선생을 앙모하는 마음과 조선 선비문화의 기록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최치원선생의 성지로, 그의 행적을 추모하며 남긴 암반의 기록들은 목판에 새긴 팔만대장경과 함께 천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