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세로로 보면 봉우리라.橫看成領側成峰
  •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입 벌려 웃지않으면 바보!!
  •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 有仙則名 산은 높고낮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신선이 살아야 이름을 날린다.
석각 石刻

문경 봉암사 백운대 석각 탐방 2021 8 31

by 검은마루 2021. 8. 31.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지증국사智詵:智證國師)가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종립 선원으로(禪道場) 많은 수행자들이 정진하고 있다. 봉암사가 있는 희양산은 조계종 특별 수행지구로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며 1년에 하루 부처님오신날만 개방된다. 그래서 그런지 희양산과 주변 계곡은 원시적 자연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청정 자연지구로 모두가 생전에 한번은 가봐야 할 산과 사찰로 국민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오늘은 오랜 세월 봉암사에서 수행해온 고우대종사께서 입적하시어 조문차 들른다.

희양산의 모습이 멀리서도 웅장하다.

봉암사 통제소 앞 야유암夜遊岩 석각위에서...

야유암夜遊岩...신라 최치원 선생이 썼다고 하는데...봉암사에는 최치원선생이 썼다는 석각이 전해오는데...야유암, 백운대, 고산유수 명월청풍....신라시대 사찰은 전부 원효나 의상스님이 창건했듯   오래된석각은 모두 최치원선생의 이야기가 나오니 유불선을 떠나 한 시대가 존경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최치원선생이 썼든 이름을 지었든 이러한 전설과 역사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癸巳계사년 가을에 다녀간 문경현감 김병선金炳先 황수묵黃守默  의 이름도 보이고

위사진은 1910년경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봉암사 일주문. 현제와 변한것이 없다.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높이 4.5미터, 폭 4.4미터)은 17세기 환적당 의천스님의 제자인 명찰스님이 지은 문집 '풍계집'에 현종 4년인 1663년에 환적스님이 주관하여 마애불을 조성하고 사적비를 세웠으며 환적암을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옵니다.

​마애미륵여래좌상의 오른손은 연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연꽃가지를 받치고 있는 결좌부좌한 용화수인龍華手印(손의 모양)을 보고 미륵부처님임을 알수 있다고 합니다. 수인은 늘 봐도 헷갈리네요.

마애불 바로 뒤 퇴은退隱 석원石園 석각.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기 좋은곳. 

백운대白雲臺 석각. 최치원이 썼다고 하나 너무 잘써서 조선 말기의 글씨로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불공계 계원명단...봉암사 불사를 위해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이다.  대정2년(1914) 4월 8일 화주 이석원

석원石園 이라 이름붙일만 하다.

봉암사 삼층석탑 뒤로 금색전, 희양산이 보인다.

1910년경 일제가 촬영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삼층석탑과 희양산. 산의 모습은 변한것이 없다.

봉암사 극락전. 이 건물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기둥 12개가 이층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사리탑에 사천왕상과 보살상, 8부신중상이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새겨있다.

보물로 지정되있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 사리탑... 옆에 있는 사리탑비는 최치원이 작성한 글로 대한민국 국보이다. 같은분의 사리탑과 탑비인데 하나는 국보, 하나는 보물....최치원의 흔적이 더해져서 그렇겠지. 

1910년경 일제가 촬영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지증대사 탑. 지붕석이 반이 잘린 상태인데 지금은 잘린 지붕돌을 붙여 복원을 시켜 온전한 모습이다. 문화재 복원기술이 대단한것 같다.

봉암사 공양간 뒤편 계단으로 올라가면 동암 우측으로 세기의 사리탑이 보인다. 맨 좌측이 2020년에 입적하신 수좌 적명스님의 사리탑. 수도암에서 세철을 모시고 살았는데 워낙 대나무 처럼 꼿꼿한 분이라 사리탑도저리 꼿꼿하게 모신것 같다.